
신부 · 설립자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
(Joseph Benedict Cottole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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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세푸스 베네딕투스 코톨렌고(Josephus Benedictus Cottolengo, 또는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는 1786년 5월 3일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Piemonte) 지방 토리노(Torino) 근처에 있는 브라(Bra)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금 징수원이었던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어머니를 둔 중산층 가정의 12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머니로부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삶을 배웠다.
그는 청소년기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군대의 피에몬테 침략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 1802년에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는데, 전쟁으로 인해 신학교가 문을 닫아 처음에는 집에서 비밀리에 공부했고, 이어서 1805년 아스티(Asti) 신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당시 나폴레옹이 신학교와 수도회에 부과한 온갖 제약 때문에 성소를 실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1811년 6월 8일 25살의 나이에 토리노 신학교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다음 날 고향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는 고향 인근 코르넬리아노 달바(Corneliano d’Alba) 본당의 보좌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기도하고 일하며, 밤에는 병자들을 돌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하면서 건강을 해치자 이를 걱정한 어머니의 권유로 학업을 재개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는 토리노 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다시 시작해 2년 뒤인 1816년 신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1818년경 토리노의 성체성사 대성당(Basilica del Corpus Domini)의 참사 위원이 되었다.
그는 8~9년 동안 성실한 참사 위원으로서 설교와 고해성사에 힘쓰며 자신이 받은 모든 수입과 선물과 기부금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ius de Paul, 9월 27일) 신부의 삶에 매료되어 자신의 소명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당시 토리노는 프랑스의 점령에서 해방된 후 시골에서 올라온 엄청난 수의 이주민으로 인해 심각한 빈곤과 다양한 사회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1827년 9월 2일 그는 비극적인 일을 겪었다.
한 프랑스 가족이 리옹(Lyon)으로 돌아가는 길에 토리노를 지나게 되었는데, 임신 중인 젊은 여인이 병이 나서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그 여인은 임신 중이라는 이유로 일반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았고, 결핵에 걸렸다는 이유로 전염의 위험 때문에 산부인과 병원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병든 부랑자를 위해 시에서 마련한 시설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는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위로하였다.
눈앞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부인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을 만들 결심을 했다.
그는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고 몇몇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1828년 1월 17일 토리노 중심부에 있는 집의 방 몇 개를 빌려 가난한 병자들을 위한 보호소를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입소를 거부당하지 않았다.
가난하고 가족조차 없는 이들, 불치병으로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이들이 하나둘 이곳으로 찾아왔다.
환자 수가 늘어나면서 이웃들의 불만도 커지기 시작했고, 1831년 피에몬테 일부 지역에서 콜레라가 창궐하자 시 당국으로부터 보호소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결국 도시 외곽 발도코(Valdocco)에 집을 사서 이주하였다.
그리고 1832년 4월 27일 여러 후원자와 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하느님 섭리의 작은 집’(Little House of Divine Providence)의 문을 열었다.
그는 이 집을 성 빈첸시오 드 폴의 보호 아래 맡기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Caritas enim Christi urget nos, 2코린 5,14 )라는 말씀을 모토로 내세웠다.
그는 질병의 종류와 상관없이 모든 환자를 받아들였고, 병원에서조차 거부되는 모든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하나씩 마련해나갔다.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와 작업장 그리고 거리의 여성들을 위한 보호소도 설립했는데, 그러면서 하느님 섭리의 ‘작은 집’(Piccola Casa)은 마치 자선을 위한 하나의 도시처럼 성장하였다.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는 하느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이 모든 일을 이루었고, 함께 그 뜻을 이어갈 동료들을 양성하기 위해 형제회, 사제단, 수녀회 등을 설립하였다.
그는 병원에서 육체노동과 병자들을 돌보는 일을 담당할 성 빈첸시오 형제회(현재는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 형제회)를, 영적인 돌봄을 제공하기 위해 ‘성삼위 사제회’(현재는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 사제회)를 설립했으며, 하느님 섭리의 작은 집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할 여러 수녀회도 설립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성 빈첸시오의 딸들’(현재는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 수녀회)이다.
그 외에 기도 생활을 통해 다른 사람을 돕는 관상 수도회도 설립하고, 다양한 기도 모임도 조직하였다.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 외에도 성모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성모 마리아를 수도회의 수호성인으로 모셨다.
일생을 헌신적으로 봉사한 그는 극도로 쇠약해져 1842년 56살의 나이에 수도원 책임을 후임자에게 넘기고 토리노 근처 키에리(Chieri)에 있는 형 루이지(Luigi)의 집에 머물다가 그해 4월 30일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발도코 본당 제단 아래 안장되었다.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는 일꾼’으로 불렸던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의 전구를 통해 기적이 일어나면서 그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가 시작되었다.
그는 1917년 4월 29일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4년 3월 19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삶은 고아들의 아버지이자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이 된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 1월 31일)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성 요한 보스코는 사제 생활 초기에 그가 설립한 ‘작은 집’에서 한동안 봉사했었다고 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 12월 25일 발표한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에서 그를 ‘선의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사회적 사랑의 영원한 모범으로 우뚝 서 있는 성인’ 중 한 명으로 언급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4월 30일 목록에서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 신부가 오직 하느님의 섭리만을 믿고 작은 집을 열어 가난하고 병들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모든 사람을 환영하며 헌신적으로 일하다가 토리노 근처 키에리에서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1건)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 증거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203-206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