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부 · 설립자 · 교육자
성 요셉 데 갈라산즈
(Joseph de Calasa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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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세푸스 데 칼라산즈(Josephus de Calasanz, 또는 요셉 데 갈라산즈)는 1557년경, 아마도 9월 11일에 에스파냐 아라곤(Aragon) 왕국의 페랄타 데 라 살(Petralta de la Sal) 근처의 칼라산즈(Calasanz) 성(城)에서 귀족이자 그 마을의 시장인 아버지 페드로 데 칼라산즈(Pedro de Calasanz)와 교사인 어머니 마리아 가스통(Maria Gaston)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기에 부모는 그를 페랄타에 있는 학교에 보내 기초 교육을 받도록 했고, 그 후에는 고향에서 20km 정도 떨어진 에스타디야(Estadilla)로 보내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하도록 했다.
이어서 그는 레리다(Lerida) 대학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1571~1577년).
그 뒤로도 발렌시아(Valencia) 대학과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그가 공부하던 중에 어머니와 형이 사망하자, 아버지는 그가 돌아와 결혼하여 가문을 이어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1582년에 성 요셉 데 갈라산즈가 갑자기 생명을 위협하는 중병을 앓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가 회복되면 사제가 되는 것을 막지 않겠다고 했고, 실제로 병이 낫자 아버지는 약속을 지켜 그를 결혼시키려던 계획을 포기하였다.
성 요셉 데 갈라산즈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583년 12월 17일에 우르헬(Urgell)의 우고 암브로시오 데 몬카다(Hugo Ambrosius de Moncada)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알바라신(Albarracin) 교구에서 활동했는데, 교구장인 델라 피게라(Della Figuerra) 주교는 그를 자신의 고문 신학자이자 주교 대리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델라 피게라 주교가 레리다(Lleida) 교구장으로 임명되자 성 요셉 데 갈라산즈도 그를 따라 새 교구로 갔다. 1586년에 델라 피게라 주교가 몬세라트(Montserrat) 수도원을 사목 방문할 때 그도 비서로 동행했는데, 주교는 이듬해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우르헬의 주교는 그를 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Cataluna) 지방의 주교 대리로 임명하고 안도라(Andorra)에 접근이 어려운 계곡에서 수도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을 돌아보도록 했다.
외딴 지역을 힘겹게 방문하며 수도 생활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돌아온 뒤에 그는 교구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모든 경력이나 능력으로 보아 그가 그 직책에 적임자라고 보았으나 그는 자신의 소명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1592년에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고향으로 간 그는 장례를 마친 후 자신의 상속 재산을 형제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여러 자선 기관에 기부하고 로마(Roma)로 여행을 떠났다.
로마에서 그는 마르코 안토니오 콜론나(Marco Antonio Colonna) 추기경을 만났는데, 그는 성 요셉 데 갈라산즈 신부를 자신의 고문 신학자 겸 조카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로마에서 교육과 자선 활동을 위한 공동체 설립을 시도하게 되었다.
로마는 그가 자선 활동을 펼치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시민들의 무지와 윤리적 타락, 특히 부모가 죽은 뒤 버림받은 고아들이 1595년 페스트가 한창일 때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병자 간호 성직 수도회’(Clerici regulares infirmis ministrantes)를 설립해 빈민가의 병자들을 돌보는 성 가밀로 데 렐리스(Camillus de Lellis, 7월 14일)와 함께 병자들을 돌보면서 부모를 잃고 방치된 아이들을 보살피고 교육하는 일이 급선무임을 깨달았다.
그는 로마에서 주일과 축일에 어린이와 성인을 대상으로 교리를 가르쳤던 ‘그리스도교 교리 형제회’(Confraternity of Christian Doctrine)에 가입하여 거리의 소년 소녀들을 불러 모았다.
하지만 적은 급료를 받으며 봉사하는 교사들이 그들을 맡아 무료로 교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1597년 11월에 그의 뜻에 공감한 몇몇 신부의 도움으로 테베레강(Tevere R.) 건너편 빈민가에 방 두 개를 얻어 유럽 최초의 무료 공립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봉사할 뜻을 지닌 신부들과 함께 그리스도교 교리 형제회를 수도회로 전환하고자 했다.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는 매년 지원금을 보내주었고, 1602년에 회칙 “비베 보치스 오라쿨로”(Vivae Vocis Oraculo)를 통해 성 요셉 데 갈라산즈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교사들의 모임을 서원하지 않는 재속 단체로 승인하였다.
후임 교황인 바오로 5세(Paulus V)도 계속해서 그의 학교를 지원하였고, 1612년에 그의 학교는 산 판탈레오(San Pantaleo)에 인접한 토레스(Torres) 저택으로 옮겨 갔다.
이곳에서 성 요셉 데 갈라산즈는 자신의 소명을 수행하며 말년까지 생활하였다.
바오로 5세 교황은 1617년에 요셉이 설립한 경건한 학교 공동체를 공식 수도회로 승인해 주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지원과 협력으로 오래지 않아 유사한 많은 학교가 설립 · 개교하여 학생 수가 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1621년 11월 18일에 그의 수도회는 교황 그레고리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정식 인준을 받은 수도회, 즉 ‘경건한 학교의 성모 마리아의 정규 가난한 성직 수도회’(Ordo Clericorum Regularium Pauperum Matris Dei Scholarum Piarum)가 되었으며, 성 요셉 데 갈라산즈는 이 수도회의 종신 총장이 되었다.
보통 ‘경건한 학교 수도회’(Piarists)로 불리는 이 수도회는 다른 수도회처럼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서원을 하고, 설립자의 뜻에 따라 청소년 교육에 헌신하겠다는 네 번째 서원을 한다.
수도회 초창기에 사제들은 주로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성 요셉 데 갈라산즈는 초급과 중급 학교의 체계화에 이바지했는데, 그는 교과과정을 면밀하게 구성하고 어린이들이 선(善)을 사랑하도록 교육 원칙을 세웠다. “어린이들이 처음부터 신앙과 문학 교육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삶이 행복함을 알게 된다.”라고 그는 기록하였다.
이러한 학교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보헤미아, 폴란드 등 수많은 나라에 세워졌다.
그가 선종하기 전에 이미 6개의 관구에 500명의 회원을 거느린 37개 공동체의 수도회로 성장하였다.
이렇게 빨리 성장하면서 수도회 내부의 갈등과 분쟁도 발생해 그는 큰 고통을 겪었다.
외부적으로도 수도회의 활동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았다.
비판자들은 무료로 가난한 이들이 교육을 받게 되면 지금까지 하던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며 그의 활동을 제지하고자 했다.
게다가 나폴리(Napoli)의 피아리스트 학교 교장 신부의 아동 학대 문제로 수도회는 심각한 내홍을 겪었고, 결국 1646년 교황 인노첸시오 10세(Innocentius X)에 의해 그의 수도회는 수도회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단순 단체로 격하되었다.
성 요셉 데 갈라산즈는 자신의 수도회가 다시 복권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 희망은 그의 사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성 요셉 데 갈라산즈는 1648년 8월 25일 선종하여 산 판탈레오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1656년에 그의 수도회는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에 의해서 단순 서원 수도회로 복권되었고, 1669년에 교황 클레멘스 9세(Clemens IX)에 의해서 장엄 서원 수도회로 복권되었다.
구약 성경의 욥(Job)처럼 강인하게 모든 시련을 이겨낸 성 요셉 데 갈라산즈는 1748년 8월 7일 교황 베네딕토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1948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모든 그리스도교 학교의 천상 수호자’로 선포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27일 목록에서 순수한 삶과 기적으로 유명한 성 요셉 사제가 로마에서 선종했는데, 그는 청소년들에게 신앙심과 문학을 가르치기 위해 경건한 학교의 성모 마리아의 정규 가난한 성직 수도회를 설립했다고 전해주었다.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 그의 축일은 선종한 날인 8월 25일로 옮겨 기념하게 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25일 목록에서 성 요셉 데 갈라산즈 신부가 복음의 사랑과 지혜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공립학교를 설립하고, 경건한 학교의 성모 마리아의 정규 가난한 성직 수도회를 로마에 설립했다고 기록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보통 검은 수도복을 입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출처 (4건)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요셉 데 갈라산즈 사제',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96-198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요셉, 갈라상스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548-6549쪽.
- 헤수스 알바레스 고메스 저, 강운자 편역, 수도생활 역사 III - '스콜라비오스-특수 사도적 사명으로서의 교육', 서울(성바오로), 2005년, 120-128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요셉 칼라상시오', 서울(성바오로), 2002년, 218-219쪽.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