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도 톨로메이

설립자 · 수도원장

베르나르도 톨로메이

(Bernard Tolomei)

똘로메이 · 버나드 · 베르나르 · 베르나르두스 · 베른하르트 · 벨라도 · 프똘레메오 · 프똘레메우스 · 프톨레메오 · 프톨레메우스 · 프톨레마이우스 · 프톨레미

8월 20일🕰 1272-1348년

성 베르나르두스 톨로메이(Bernardus Tolomei, 또는 베르나르도 톨로메이)는 1272년 5월 10일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시에나(Siena)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요한(Joannes)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일찍부터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시에나의 산 도메니코 디 캄포레조(San Domenico di Camporeggio) 대학에서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자들에게 교육을 받고 법학을 전공해 행정관이 되었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루돌프 1세(Rudolf I, 1273~1291년 재위) 왕에게 기사 작위도 받았다.

신심이 깊었던 그는 스칼라(Scala) 병원의 환자들을 돌보는 봉사도 했는데, 어느 날부터 차차 시력이 나빠지더니 결국은 시력을 거의 잃게 되어 공직 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전구를 청해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후에는 모든 것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도시에서 떨어진 곳으로 피신해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1313년, 당시 40대였던 성 베르나르도 톨로메이는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던 두 명의 동료, 즉 파트리치오 파트리치(Patrizio Patrizi)와 암브로지오 피콜로미니(Ambrogio Piccolomini)와 함께 시에나를 떠나 남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버려진 마을인 아코나(Accona)의 동굴로 들어갔다.

그 마을은 그의 가문 소유지였다.

그곳에서 성 요한은 어려서부터 흠모했던 클레르보(Clairvaux)의 성 베르나르도(8월 20일)를 기리기 위해 베르나르도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서원하면서 정식 수도명으로 선택하였다.

이들 평신도 은둔자들의 참회 생활은 기도와 성경 묵상, 육체노동과 침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시에나, 피렌체(Firenze), 그리고 주변 지역에서 온 다른 동료들도 곧 그들과 합류했는데, 그들이 추구하던 삶의 모범은 사도들과 테베(Thebae) 수도원의 초대 사막 수도승들의 생활 방식이었다. 1318년 말이나 1319년 초 어느 날, 성 베르나르도는 기도에 몰두하던 중 흰옷을 입은 수도승들이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사다리를 오르는 모습을 보았고, 그곳에서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고 한다.

당시 아비뇽에 거주하던 교황 요한 22세(Joannes XXII)의 특사 베르트란도 디 포예(Bertrando di Poyet) 추기경은 이 단체의 활동 준수를 감독하기 위해 방문하였다(1316년~1319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315년)에서 결정한 바에 따르면, 교회의 사전 승인 없이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성 베르나르도는 자신과 동료가 생활하는 새로운 단체의 교회법적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파트리치오 파트리치와 함께 당시 아코나가 속해 있던 아레초(Arezzo)의 주교를 찾아갔다.

그들은 미래의 산타 마리아 디 몬테 올리베토 수도원 설립을 위한 회칙을 성 베네딕토(Benedictus, 7월 11일)의 규칙하에 제정하는 것으로 1319년 3월 26일 아레초 주교의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주교가 파견한 사제 앞에서 수도 서원을 할 수 있었다.

성 베르나르도는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선택하면서 은수자와 같은 생활 방식에서 성 베네딕토회의 공동체 생활 방식으로 바꾸고 이전보다는 다소 규칙을 완화하였다.

초기 설립자들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려는 마음에서 흰색 수도복을 입었고,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그들이 설립한 새로운 수도회 영성의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1319년 4월 1일, 산타 마리아 디 몬테 올리베토 마조레(Santa Maria di Monte Oliveto Maggiore) 수도원이 탄생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이 정착한 아코나 사막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은둔하시기를 좋아하셨고, 수난 전에 기도하셨으며, 승천하는 곳으로 알려진 올리브 산을 기념해 ‘몬테 올리베토’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은둔자들이 성 베네딕토회 규칙에 따른 수도승이 되면서 수도회가 상대적으로 쇠퇴하던 시기에 몇 가지 제도적 변화를 가져왔다.

제도적 변화의 가장 큰 특징은 수도원장 직책의 임시적 성격이었다.

수도원장은 영원히 재임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지만, 총회는 수도원장의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기로 결의하였다.

더욱이 선출된 수도원장은 아레초 주교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수도원장을 선출해야 할 시기가 되었을 때, 성 베르나르도는 시력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수도승들을 설득해 자신을 선출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파트리치오 파트리치가 1319년 9월 1일에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비슷한 선출 방식에 의해서 1320년 9월 1일에는 암브로지오 피콜로미니가, 1321년 9월 1일에는 시에나 출신의 시모네 디 투라(Simone di Tura)가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322년 9월 1일, 성 베르나르도는 더는 형제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서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되었고, 죽을 때까지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이는 성 베르나르도의 탁월한 성덕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수도승들은 매년 임기가 끝날 때마다 기존의 수도원장은 재선출하지 않기로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규정을 무시하고 27년 동안이나 그를 수도원장으로 계속 재선출했기 때문이다.

실제 1347년 5월 4일 총회에서는 수도원장의 권위에 대한 극단적인 신뢰가 드러났는데, 수도승들은 수도원장에게 총회나 형제들과 상의할 필요 없이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는 수도원장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고 모두의 구원을 위해 처리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무렵 산타 마리아 디 몬테 올리베토 수도원은 한 명의 수도원장이 이끄는 수도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고, 개별 수도원들은 부원장의 지도하에 생활하였다.

성 베르나르도는 1326년과 1342년에 적어도 두 차례에 걸쳐 수도원장 직을 사임하려고 시도했는데, 교황 특사와 법률 전문가들에게 자신은 사제도 아니고 만성적인 시력 장애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 베르나르도가 수도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여러 도시에서 많은 사람이 새 수도원으로 몰려들었다.

수도승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그는 자신들의 도시와 지역에서도 흰옷을 입은 수도승들을 원하는 주교들과 평신도들의 요청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 결과 본원과 밀접하게 연결된 10개의 수도원을 더 설립하였다.

이 수도원들은 본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수도원장의 관리하에 운영되었다.

성 베르나르도는 자신이 시작한 일들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도록 1344년 1월 21일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VI)에게 ‘산타 마리아 디 몬테 올리베토’라는 이름의 독립적인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대한 설립 승인을 받았다.

그가 설립한 수도회는 14세기와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150개가 넘는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성 베르나르도 톨로메이와 수도승들은 거룩한 삶, 덕행의 영웅적 실천, 그리고 타인에 대한 봉사와 관상에 헌신한 삶의 모범을 남겨주었다. 1348년 대역병이 창궐했을 때, 성 베르나르도는 몬테 올리베토 수도원의 고독한 생활을 떠나 시에나의 산 베네데토 아 포르타 투피(San Benedetto a Porta Tufi) 수도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전염성이 강한 역병에 걸린 시민들과 동료 수도승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82명의 수도승과 함께 역병에 걸려 선종하였다.

그가 선종한 날은 전통적으로 1348년 8월 20일로 알려져 있다.

성 베르나르도의 유해는 1554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황제(1530~1556년 재위)와 시에나 간의 전쟁으로 시에나 수도원이 파괴되면서 사라졌다.

성 베르나르도 톨로메이는 1644년 11월 24일 교황 인노첸시오 10세(Innocentius X)에 의해 공경이 승인되면서 시복되었다고 하는데, 교황청 시성부 웹사이트는 1664년 11월 24일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에 의해 시복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2009년 4월 26일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성 베르나르도 톨로메이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와 함께 시에나의 수호성인들 가운데 한 명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의 축일은 한동안 평소 그가 존경했던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와 같은 날을 피하고자 하루 뒤인 8월 21일에 기념했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21일 목록에서 토스카나(Toscana) 지방 시에나에 올리베탄(Olivetans) 수도회의 설립자이자 수도원장인 ‘복자’ 베르나르도 프톨레미(Bernardus Ptolemy)가 있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20일 목록으로 축일을 옮겨서 시에나에서 성 베네딕토의 규칙에 따라 올리베탄 수도회(Congregatio Sanctae Mariae Montis Oliveti, OSBOliv)를 설립한 ‘복자’(2004년 당시) 베르나르도 톨로메이 수도원장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수도 생활 규율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힘썼으며 이탈리아 전역에 퍼진 역병으로 인해 시에나 수도원의 수도승들과 함께 병에 걸려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성 베르나르도 톨로메이는 성 베르나르두스 프톨레메우스(Bernardus Ptolemaeus, 또는 베르나르도 프톨레메오)로도 불린다.

성 베네딕토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8월 19일에 선택 기념일로 지내고 있다.♣

가톨릭 용어 안내

성인(성녀)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되어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사람. 넓게는 거룩한 사람, 곧 하늘나라(천국)에 간 모든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대천사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를 뜻하며,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가 있습니다.

복자(복녀)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합니다. 복자가 시성(諡聖)되면 성인(여자는 성녀)이 됩니다.

세례명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때 받는 이름. 좋아하는 성인의 이름을 골라 정하며, 일생 동안 그 성인을 수호자로 공경하며 그 덕행을 본받으려 애씁니다. 흔히 본명(本名)이라고도 합니다.

영명축일

가톨릭 신자가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한 수호 성인의 축일.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이 축일이 됩니다.

성인 자료 출처: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 · catholic.or.kr